| 최초 작성일 : 2026-01-22 | 수정일 : 2026-01-22 | 조회수 : 21 |

“환율, 특별한 대책이 있으면 이미 했겠죠…한두달뒤 1400원 전후로” (한국일2026-01-21) ----------------- 그 말을 듣는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힘이 몸에서 빠져나갔다. 우리는 위기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듣는다. 경제가 어렵다 하고, 전망이 불투명하다 하고, 상황이 복잡하다고 한다. 그 말들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말들 뒤에 꼭 따라붙는 한 문장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마땅한 방법이 없다.” 이 말은 사실처럼 들린다. 냉정하고, 솔직하고, 현실적인 진단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이 반복될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질문을 멈추고, 토론을 접고, 기대를 낮춘다. 조용해진다. 이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심리학에는 ‘침묵의 나선’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소수라고 느끼는 순간, 틀릴까 봐서가 아니라 고립될까 봐 입을 다문다. 그 침묵은 다시 다수의 착시를 만들고, 그 착시는 또 다른 침묵을 부른다. 이렇게 침묵은 스스로를 증폭시킨다. 문제는, 이 침묵의 출발점이 언제나 공포는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체념’에서 시작된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오래전 실험을 통해 통제할 수 없는 실패를 반복 경험한 존재는 나중에 탈출이 가능해져도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통이 사람을 멈추게 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안 된다”는 학습이 움직임을 빼앗았다. 이 구조는 개인에게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조직에서도, 기업에서도, 국가에서도 반복된다. 군대에서는 패배보다 더 위험한 순간이 있다. 지휘부가 “이길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병사들은 싸우지 않는다. 아직 총알이 남아 있어도, 아직 길이 있어도, 사고가 멈춘다. 기업에서도 비슷하다. 경영진이 “해법이 없다”고 선언하면 조직은 혁신하지 않는다. 회의는 보고로 바뀌고, 보고는 책임 회피로 바뀐다. 문제는 남지만, 질문은 사라진다. 국가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위기의 순간을 통과한 지도자들은 완벽한 해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하나, 끝까지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대공황 시기의 루스벨트는 정확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언어를 바꿨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처칠도, 드골도, 링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능성을 과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성의 언어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생각을 멈추지 않도록, 희망을 강요하지 않되 절망을 학습시키지도 않았다. 이 지점에서 침묵의 나선은 다시 작동한다. 지도자의 언어가 체념으로 기울면, 사회는 빠르게 조용해진다. 조용해진 사회에서는 비판도, 제안도, 반론도 줄어든다. 그리고 그 고요함은 안정이 아니라 무기력이 된다. 이 글은 해법을 말하려는 글이 아니다. 전망을 제시하려는 글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방법이 없다”는 말은 상황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사고를 닫아버리는 문장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어제, 침묵이 어떻게 사회를 잠식하는지를 이야기했다. 오늘은 그 침묵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어제의 침묵의 나선 위에 오늘 뉴스의 이 한 문장이 겹쳐진다. “환율, 특별한 대책이 있으면 이미 했겠죠.” 그 말을 들으며 우리는 다시 조용해진다. 그래서 지금 나는, 답이 아니라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두 달 뒤라는 말에, 생각을 맡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