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작성일 : 2025-12-16 | 수정일 : 2025-12-16 | 조회수 : |
Daily News Essay는 뉴스를 요약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반복하지 않고, 그 뉴스가 내 일상에 남기는 감정과 균열을 짧은 에세이로 기록합니다. 이 글은 해설도, 사설도 아닙니다. 숫자와 주장 대신, 우리가 그 뉴스를 읽으며 느꼈지만 말로 옮기지 못했던 감각에 집중합니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이 뉴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에서 출발해, 오늘 하루의 생각 하나를 남기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도서관 대출 1위는 여전히 소설… 영상 시대의 역설(연합뉴스, 12월 15일) 숏폼 범람 속에서도 긴 글 독자는 사라지지 않았다(한국일보, 12월 14일) 정보는 넘치지만 이해는 부족한 시대(경향신문, 12월 13일) ----------------------- 뉴스는 점점 짧아지고, 영상은 점점 빨라졌다. 요약과 핵심만 남기고, 맥락과 여운은 잘려 나갔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하나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속도를 향해 달려가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비효율적인 형식, 가장 느린 매체를 굳이 선택한다. 이 선택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피로의 반작용에 가깝다. 정보는 설명하지만, 설명만으로는 삶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건을 아는 것보다, 그 사건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소설은 남는다. 소설은 정답을 주지 않지만, 시간을 들여 한 사람의 속도로 삶을 통과하게 만든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받아들일 속도다. 이 지점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이야기의 쇠퇴’를 말했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역할을 분명히 했다. 정보는 즉시 소비되지만, 이야기는 경험으로 남는다. 그리고 경험만이 다음 선택을 견디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똑똑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흔들리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정확한 설명 대신, 불완전한 감정을 건네받기 위해서다. 소설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지만, 문제 속에 머무를 용기를 준다. 이 사회가 여전히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은 희망의 증거라기보다 필요의 증거에 가깝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만큼 방향을 잃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이야기를 찾는다. 속도는 계속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해는 속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한, 이 사회는 아직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