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작성일 : 2025-12-16 | 수정일 : 2025-12-16 | 조회수 : |
Daily News Essay는 뉴스를 요약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반복하지 않고, 그 뉴스가 내 일상에 남기는 감정과 균열을 짧은 에세이로 기록합니다. 이 글은 해설도, 사설도 아닙니다. 숫자와 주장 대신, 우리가 그 뉴스를 읽으며 느꼈지만 말로 옮기지 못했던 감각에 집중합니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이 뉴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에서 출발해, 오늘 하루의 생각 하나를 남기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아파도 못 쉰다”… 유급병가 없는 노동자 여전히 다수(경향신문, 12월 15일) 몸이 아파도 출근하는 ‘프리젠티즘’ 확산(한겨레, 12월 14일) 쉬지 못하는 노동, 건강 격차 키운다(서울신문, 12월 13일) ---------------------- 아플 때는 쉬라는 말은 더 이상 조언이 아니다. 그 말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로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모르는 잔인한 문장이 된다. 몸이 아파도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열이 있어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쉬는 순간 바로 생활이 흔들리는 사람들. 그들에게 휴식은 권리가 아니라 사치의 다른 이름이다. 이 사회에서 쉬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구조 때문이다. 쉬면 밀리고, 밀리면 대체되고, 대체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구조. 그래서 사람들은 아픔을 참고 일한다. 병을 관리하는 대신, 증상을 숨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쉬지 못하는 삶은 결국 아픈 상태를 정상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피로가 기본값이 되고, 통증은 참고 넘겨야 할 일상이 된다. 이 상태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이 말한 ‘리스크 사회’의 이후 단계에 가깝다. 위험은 더 이상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을 견뎌내기 위해 감수해야 할 조건이 되었다. 우리는 종종 개인의 선택을 묻는다. 왜 병원에 가지 않았는지, 왜 쉬지 않았는지. 그러나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왜 이 사회는 쉬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가. 휴식이 개인의 용기가 된 사회에서 건강은 더 이상 공공의 문제가 아니다. 각자가 알아서 관리해야 할 능력이 된다. 그리고 그 능력이 부족한 사람부터 조용히 탈락한다. 아플 때 쉬라는 말이 다시 위로가 되려면, 쉬어도 괜찮은 구조가 먼저 와야 한다. 그 전까지 이 문장은 가장 옳지만,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