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작성일 : 2025-12-15 | 수정일 : 2025-12-15 | 조회수 : |
이미 전달된 사실을 반복하지 않고,언론이 말하지 못한 의미를 이론이라는 렌즈로 다시 바라봅니다. 이곳의 글은 속보가 아니며, 요약도 아닙니다. 하나의 이슈를 여러 보도로 모아 그 안에서 드러난 구조와 언어의 빈틈을 천천히 사유합니다. Daily News Essay가 매일의 감각이라면, in the news는 가끔 멈춰 서서 읽는 생각의 기록입니다. 여기서는 답보다 질문이 남고, 결론보다 해석의 여운이 중요합니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무엇이 아직 말해지지 않았는가 입니다.
요즘 교육 뉴스에는 이상한 공통점이 있다. 사건의 규모는 작지만, 불편함은 오래 남는다. 누군가는 과민 반응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개인의 일탈이라 정리한다. 그러나 비슷한 장면은 반복된다. 장소만 다를 뿐, 감정의 결은 닮아 있다. 이 불편함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분노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다. 어딘가 너무 앞서가 버린 사회의 속도에 뒤처진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압력에 가깝다. 그리고 그 압력은 가장 약한 지점에서 먼저 터진다. 이 글은 빠르게 읽히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같은 오해를 계속 반복하게 된다.

“아직 덧셈·뺄셈도 못 해?” 초등 1학년 체벌 교사 벌금형(서울경제 / 12월 14일) 교실 내 체벌 논란 재점화… 교사 책임만으로는 부족(한겨레 / 12월 14일) 저연령 학습 가속화, 교육인가 압박인가(경향신문 / 12월 13일) 교사·학생 모두 소진시키는 성취 중심 교육 구조(서울신문 / 12월 12일) “아이의 속도는 죄가 아니다” 현장 교사들의 경고(연합뉴스 / 12월 12일)
언론은 체벌을 말했다. 그러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 덧셈과 뺄셈을 더디게 이해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전혀 비정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분노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문제가 아이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분노는 이해의 실패에서 나오지 않는다. 속도의 불일치에서 나온다. 지금의 교실에는 보이지 않는 시계가 걸려 있다. 모든 아이가 같은 속도로 도달해야 하는 시간표다. 이 시간표는 기다림을 허용하지 않는다. 조금 늦은 이해는 노력 부족이 아니라 관리 실패처럼 취급된다. 이 지점에서 폭력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압박이 선택한 출구가 된다. 압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아래로 흐를 뿐이다. 이 현상은 푸코의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과 닮아 있다. 권력은 더 이상 명령하지 않는다. 기준을 세우고, 속도를 정하고, 그에 맞추지 못한 자에게 스스로를 조정하라고 요구한다. 교사는 통제자가 아니라 전달자에 가깝다. 동시에 이 장면은 한병철이 말한 성과사회(Achievement Society)의 단면이다. 폭력은 금지되었지만, 성과는 더욱 앞당겨졌다. 아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도달 시간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처벌로 끝낼 수는 있지만,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이 구조가 지속된다면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꿀 뿐이다. 때리는 손은 줄어들겠지만, 압박은 더 정교해질 것이다. 언론은 교사를 말했지만, 말하지 못한 것은 이것이다. 교육이 더 빨라질수록,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이해다.
이 현상은 이미 개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아이에게는 따라잡으라는 선택을, 교사에게는 밀어붙이라는 선택을. 그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을까. 아이의 이해를 기다릴 수 있는 시간, 교사가 멈춰 서도 되는 여백, 교육이 성과 이전에 관계였다는 감각.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폭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내면화될 뿐이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법을 배우고, 교사는 실패를 자기 책임으로 삼게 된다. 이 사회는 묻게 될 것이다. 왜 모두가 이렇게 지쳐 있는가를. 그러나 그 질문은 너무 늦게 도착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