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작성일 : 2025-12-15 | 수정일 : 2025-12-15 | 조회수 : |
Daily News Essay는 뉴스를 요약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반복하지 않고, 그 뉴스가 내 일상에 남기는 감정과 균열을 짧은 에세이로 기록합니다. 이 글은 해설도, 사설도 아닙니다. 숫자와 주장 대신, 우리가 그 뉴스를 읽으며 느꼈지만 말로 옮기지 못했던 감각에 집중합니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이 뉴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에서 출발해, 오늘 하루의 생각 하나를 남기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정년 연장 찬성 여론 확산… 노후 불안이 배경」(시사저널, 12월 13일) 「연금 불안 속 고령자 노동 의존 심화」(한겨레, 12월 12일) 「은퇴 이후 삶, 준비되지 않은 사회」(경향신문, 12월 11일) 「정년 연장’ 찬성 79%…그들은 정말 일을 계속하고 싶은 것인가, 불안한 것인가」 (시사저널2025. 12. 13). ---------------------------- 정년 연장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79%에 달했다. 이 숫자만 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질문을 조금만 바꿔보면, 이 선택의 결은 전혀 다르게 읽힌다. 정말 일을 더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멈출 수 없어서일까. 정년 이후의 삶은 아직 불분명하다. 연금은 충분하지 않고, 의료비와 주거비는 계속 든다. 일을 그만두는 순간, 수입만 끊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와 일상의 리듬까지 동시에 사라진다. 그래서 정년은 휴식의 시작이 아니라, 불안의 경계선이 된다. 이때 정년 연장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방어에 가깝다. 일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일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찬성의 이유에는 ‘보람’보다 ‘현실’이 더 많이 등장한다. 정년 연장을 둘러싼 논의가 불편한 이유는 노동의 의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은 더 이상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이라기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 조건이 되었다. 멈출 수 없는 상태에서의 연장은 자유의 확장이 아니라 선택지의 축소에 가깝다. 이 뉴스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일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 오래 일함은 정말 원하는 미래를 향한 것인가, 아니면 불안을 늦추기 위한 연장선인가. 정년 연장은 노동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가 노후의 안전을 개인에게 떠넘겼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숫자 79%는 희망의 표현이 아니라 집단적 불안의 통계처럼 읽힌다. 이 장면은 노동이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의무로 재편된 사회를 보여준다. (울리히 벡 Ulrich Beck이 말한 ‘리스크의 개인화’가 일터에 스며든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