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작성일 : 2025-12-15 | 수정일 : 2025-12-15 | 조회수 : |
Daily News Essay는 뉴스를 요약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반복하지 않고, 그 뉴스가 내 일상에 남기는 감정과 균열을 짧은 에세이로 기록합니다. 이 글은 해설도, 사설도 아닙니다. 숫자와 주장 대신, 우리가 그 뉴스를 읽으며 느꼈지만 말로 옮기지 못했던 감각에 집중합니다.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이 뉴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에서 출발해, 오늘 하루의 생각 하나를 남기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수능 난이도 논란… ‘평가인가 배제인가’」(한겨레, 12월 12일) 「전문가도 풀기 어려운 문제, 공정성 논쟁 확산」(연합뉴스, 12월 13일) 「사고력 평가라는 명분, 과도한 난도는 누구를 위한가」(경향신문, 12월 13일) 「물리 문제 풀다 포기" 카이스트 총장도 두 손 든 수능」 교수·소설가 등 10여명 풀어보니 (조선일보 2025.12.13.) ------------------------ 문제를 풀다 포기했다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교수도 있었고, 소설가도 있었다. 그리고 카이스트 총장도 두 손을 들었다. 그런데 이 시험을 실제로 치른 사람은 열아홉 살의 학생들이었다.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시험은 대체 무엇을 증명하려고 하는가. 한 평가자는 이렇게 말했다. “국어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은 대학 수학 능력을 평가받은 게 아니라,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이 문장은 시험을 비판하지 않는다. 시험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순간을 보여줄 뿐이다. 만약 문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다면, 왜 굳이 대학에 가서 더 배워야 하는가. 이 역설이 성립하는 순간, 시험은 교육의 출발점이 아니라 완결점이 된다. 언제부터 시험은 더 배울 사람을 가려내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다 해낸 사람만 통과시키는 장치가 되었을까. 이제 시험은 이해를 확인하기보다 접근 가능한 사람을 제한한다. 그래서 난이도는 높아지고, 지문은 해독에 가까워진다. 시험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진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평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수록,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누구도 쉽게 풀 수 없게 만들어야 공정해 보인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 결과 시험은 학습의 일부가 아니라 교육 바깥의 관문이 된다. 이 뉴스가 불편한 이유는 분명하다. 학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시험이 과도한 역할을 떠안았기 때문이다. 교육이 책임져야 할 과정을 시험이 대신 판결하려 들 때, 시험은 점점 사고력보다 체력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시험이 어렵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묻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무엇을 가려내려는 것인가. 그리고 그 가려짐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시험은 말하고 있다. 더 배우기 위해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사람만 통과시키겠다고. 그 순간 시험은 교육의 일부가 아니라, 교육의 부정이 된다. 이 장면은 시험이 학습의 도구가 아니라 선별과 배제를 수행하는 ‘평가 권력’으로 변해왔음을 보여준다.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가 말한 규율 권력의 현대적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