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작성일 : 2025-12-12 | 수정일 : 2025-12-12 | 조회수 : |

“사무·고객응대 직군부터 자동화 가속… ‘화이트칼라의 위기’”(한국경제 · 2025.12.10) “AI 도입 기업 70%, ‘업무 재설계 불가피’”(연합뉴스 · 2025.12.09) “OECD ‘AI로 직무 30% 재편’… 대체보다 재구성”(서울경제 · 2025.12.08) ------------------------------ AI가 가장 먼저 대체할 직업을 묻는 질문은 늘 숫자와 목록으로 답해진다. 콜센터, 단순 사무, 데이터 입력, 반복 보고서 작성. 그러나 이 질문이 가리는 더 큰 진실이 있다. 지금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일자리가 없어질 가능성이 아니라, 내가 하던 일이 더 이상 ‘필요한 역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감정이다. 최근 보도들을 보면, 기업들은 ‘해고’보다 ‘업무 재설계’를 말한다. AI는 사람을 밀어내기보다, 사람의 역할을 바꾼다. 문제는 이 변화의 속도다. 역할은 수십 년에 걸쳐 쌓였는데, 소멸은 몇 달 만에 일어난다. 그래서 공포는 실직이 아니라 정체성의 공백에서 발생한다. 노동사회학에서는 이를 ‘역할 소멸 불안(role extinction anxiety)’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임금보다 역할에 먼저 매달린다. 명함에 적힌 직무, 회의에서 맡던 위치, 조직 안에서 불리던 이름— 이 모든 것이 흔들릴 때, 우리는 일을 잃기 전에 자기 설명 능력을 잃는다. 한 직장인은 이렇게 말했다. “AI가 내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보다,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더 무서워요.” 이 말은 기술의 위협이 아니라, 방향 상실의 공포를 정확히 짚는다.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가는 길의 표지가 사라진 느낌이다. AI는 특히 ‘판단을 흉내 낼 수 있는 일’을 빠르게 흡수한다. 문서 요약, 고객 응대, 기초 분석. 이 일들은 과거에 ‘전문성의 입구’였다. 이제 그 입구가 닫히면서, 경력의 사다리 자체가 재편되고 있다. 문제는 누가 대체되는가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다. 그래서 AI 시대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다. 사람이 역할을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다. 재교육, 전환, 실험의 기회가 없는 사회에서 자동화는 효율이 아니라 탈락을 만든다. 이 뉴스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역할로 일하고 있는가? 그 역할이 사라질 때, 나는 무엇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가? AI는 일을 없애기보다, 일의 이름표를 빠르게 떼어내고 있다. 불안의 정체는 기술이 아니라, 그 이름표 뒤에 남겨진 우리의 맨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