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작성일 : 2026-01-30 | 수정일 : 2026-01-30 | 조회수 : 15 |
걸어가며 폰 대신 책 보는 영국 아이들…비결은 부모들의 ‘만 14세 서약’ (매일경제 2026.01.28)

처음 이 뉴스를 봤을 때, 솔직히 이상하다고 느꼈다. 요즘 세상에 스마트폰을 늦게 주는 게 무슨 대단한 결단처럼 기사로 나올 일인가 싶었다. 영국 이야기였다. 부모들이 아이에게 만 14세까지 스마트폰을 주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고, 아이들은 길을 걸으며 휴대폰 대신 책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사진 속 장면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그런데 기사를 몇 번 다시 읽다 보니, 이상한 쪽은 오히려 내가 있는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유치원생이 태블릿으로 게임을 하고, 초등학생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중학생이 AI로 숙제를 하는 풍경. 우리는 그걸 ‘시대의 흐름’이라고 부른다. AI 선진국, 디지털 네이티브,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 그래서 더 빨리, 더 일찍, 더 많이 쥐여준다. 그런데 영국의 그 부모들은 그 불안을 정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선택은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 아닐까.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안 준다는 건, 단순히 기계를 안 쥐여주는 일이 아니다. 아이에게서 즉각적인 자극을 빼앗고 남들보다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감수하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일이다. 그건 부모에게 꽤 불편한 선택이다. 남들 다 하는 걸 안 하겠다는 선택은 언제나 설명을 요구받는다. “요즘 세상에 그게 가능해?” “나중에 더 힘들어지는 거 아니야?” “AI 시대에 너무 올드한 거 아니야?” 아마 영국의 부모들도 똑같은 질문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정말로 뒤처지는 건 누구일까. 스마트폰을 늦게 쥔 아이일까, 아니면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너무 빨리 쥐여준 어른일까. 기술은 분명히 강력하다. AI는 더 빨라지고, 더 똑똑해지고, 더 많은 일을 대신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여전히 대신하지 못한다. 아이의 성장 속도를 대신 결정해주지는 못한다. 그 속도를 정하는 건 기계도 아니고, 정책도 아니고, 결국 어른의 선택이다. 영국의 ‘만 14세 서약’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들이 기술을 몰라서가 아니라, 기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인 것 같아서다. 기술이 무엇을 줄 수 있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너무 일찍 가져가 버릴 수 있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뉴스가 오래 남는 이유는 정답을 제시해서가 아니다. 그저 조용히 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쥐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