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작성일 : 2025-12-09 | 수정일 : 2025-12-09 | 조회수 : |

대기업 10곳 중 4곳이 내년 투자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는 사실은 숫자보다 더 무거운 침묵을 남긴다. 기업이 계획을 미루는 것은 조심스러워서가 아니라 미래가 흐리지 않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던 ‘기대의 근육’이 오래된 피로처럼 소진되고 있다.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를 계산할 수 없다는 뜻이며, 미래를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은 지금의 경제가 전망이 아닌 생존 모드로 전환되었다는 뜻이다. 15%의 기업이 아예 ‘계획 없음’을 선택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신호에 가깝다. 미래가 열리지 않으면, 기업은 문을 닫지 않더라도 마음의 셔터를 내린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기대 붕괴(Expectation Collapse)’라고 부른다. 전망이 사라지는 순간 투자는 이유를 잃는다. 돈은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지금 한국 기업은 불안해서 움츠리는 것이 아니라, 어느 방향이 바른 길인지 감각 자체를 잃은 듯 보인다. 실제로 같은 조사에서 투자 연기 사유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것은 글로벌 환경 불확실성이었지만, 이는 핑계에 가깝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 경제 내부의 ‘성장 서사’가 흔들리고 있다. 성장의 이야기가 지워진 경제는 길을 잃은 기업의 표정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그 무표정한 표정을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이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이 “요즘은 투자 제안서가 올라오지 않습니다. 직원들이 스스로 미래 타당성을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해요”라고 말했다. 계획이 사라진 기업에서 사라지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자신감이다. 문제는 그 자신감의 구조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라는 데 있다. 많은 기업들은 지금 의사결정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미루어지는 상황’ 속에 갇혀 있다. 의지를 보이기보다 기류를 감지하려 하고, 판단하기보다 눈치를 본다. 한국의 기업 환경이 ‘결정의 경제’에서 ‘정지의 경제’로 빠져드는 순간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왜 투자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기업이 계획을 세우지 못할 만큼, 한국 사회는 미래를 잃었는가. 한국 경제는 지금 위기가 아니라— 기대가 사라진 사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