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요즘 화면 속 중년 남성들은 더 이상 ‘성공한 어른’이 아니다. 그들은 대체로 퇴직을 앞두었거나 이미 밀려났고, 가족의 중심이기보다 방 한켠에 남아 있다. 웃기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이 장면을 단순히 “공감형 콘텐츠의 유행”으로 읽기에는 어딘가 불편하다. 왜냐하면 이 인물들은 새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오랫동안 존재했지만 말할 언어를 갖지 못했던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중년 남성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그들을 설명하던 세계가 먼저 무너졌다.

표면에 떠오른 것들

한국 사회가 이제야 마주한 그 얼굴… ‘중년 남성’을 비추다 (조선일보 / 2025.12.23) 중년 남성 주인공 드라마·예능 동시 증가 (국내 방송 트렌드 보도 / 2025년 하반기) 퇴직·조기 은퇴 세대의 삶을 다룬 콘텐츠 확산 (문화면 다수) 이 보도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장면을 반복한다. 더 이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남성의 얼굴이다.

다르게 읽기

중년 남성 콘텐츠의 증가는 동정도, 복고도 아니다. 이것은 역할 사회(role society)의 붕괴 이후 가장 늦게 드러난 균열이다. 이 세대는 한때 가장 분명한 인생 지침을 받았다. 일하면 보상이 있고, 버티면 지위가 오르고, 가족을 책임지면 존중받는다는 약속. 문제는 그 약속이 그들이 완주하기 직전에 폐기되었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를 “고정된 정체성이 증발한 사회”라고 불렀다. 그러나 중년 남성에게 이 증발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연해지기 전에, 딱딱한 규칙 속에서 이미 몸을 만들었다. 청년은 실패를 학습할 시간이 있고, 노년은 역할에서 물러날 명분이 있다. 하지만 중년 남성은 다르다. 아직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 책임을 수행할 무대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들의 감정은 단순하지 않다. 꿈은 지나갔고, 희망은 과거형이 되었으며, 분노를 표출할 언어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사회는 이들에게 “적응하라”고 말했지만, 무엇에 적응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지금 콘텐츠가 이들을 비추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 세대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가 그들을 설명할 문법을 잃었기 때문이다.

남겨진 생각

중년 남성 콘텐츠는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뒤늦게 던지는 질문에 가깝다. 우리는 한 세대를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로 만들고도 그들에게 어떤 삶의 모델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이 웃음으로 소비될 때, 그 웃음은 종종 분노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웃음은 문제를 봉합하지만, 분노는 질문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중년 남성을 다시 영웅으로 만들 것인가가 아니다. 그들을 실패자로 호명하지 않는 언어를 갖는 것, 그리고 역할이 아닌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다. 이 콘텐츠들이 사라질 때,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외면되었기 때문이라면 그 사회는 또 한 번 중요한 질문을 놓치게 될 것이다. "중년 남성의 등장은 유행이 아니라, 사회가 미뤄온 질문의 귀환이다."